제 678 호 [상명만평] 빨강, 파랑 둘 다 싫어요
황인선 (만화학과, 4)
제 678 호 [교수칼럼] 르네상스 맨 알베르티: 융복합적 사고의 방법론과 방향성
계당교양교육원 오경은 교수 4차 산업혁명시대의 도래에 대비하여 융복합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많은 대학들, 그리고 교수님들께서 자라나는 세대의 창조력 배양을 위하여 필요한 융복합적 사고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생 여러분들께서도 사회에 나가기 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하나의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 비학문의 영역을 횡단하여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내고 이를 구체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융복합적 사고란 개념이 상당히 모호하며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효과적이다 할 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것이 현실적 상황이고, 저 역시 이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며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만 지난 몇학기 간의 수업을 통해 제가 확신하게 된 점은 융복합적 사고에 기반한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최첨단의 테크놀로지와 시류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것입니다. 가장 현대적인, 가장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최근의 기술이 어디까지 왔고 어떤 부분을 개선하면 좋을지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한 분야의 현재 판세를 완전히 뒤엎고 자신의 방법론이 쉽게 우위를 선점할 수 있는 획기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은 고전의 이해로부터 얻어지는 성찰력 및 분석력과 그것의 실천적 활용에서 온다는 점은 그닥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듯 합니다. 고전의 이해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발전할 주요한 밑바탕임을 말하기 위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1472)를 케이스스터디 대상으로 삼겠습니다. 이름이 생소하다 하시는 분들도 피렌체의 유명 관광지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이미지는 본 적이 있으실텐데, 이 매혹적인 비율미를 갖춘 파사드가 바로 알베르티의 디자인입니다. 그렇다고 알베르티를 건축가로 규정하면 그의 중요한 업적들을 놓치는 셈인데, 그는 문학가였고 교황의 참모역할을 한 성직자 겸 전략가였으며 수학자, 미술이론가, 음악이론가로도 활약했으며 문법, 종교, 농업 등에 대한 논고를 남기기한 학자였습니다.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동시대 문화의 중요한 특성인 과학과 예술의 온전한 융합현상을 명문화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그의 저술서 『회화론』(1435-6)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브루넬레스키, 마사치오, 기베르티 등 초기 및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가들의 작품이 어떻게 완벽에 가까운 외부 재현력을 갖출 수 있었는지를 분석해 이론화하는데, 그 분석에 고전을 통해 배운 수학과 과학을 도입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원근법이 바로 이 알베르티의 이론으로,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근거하여 3차원 대상물을 2차원 평면에 고스란히 담아낼 기법, 즉 원근법을 정립하게 됩니다. 이는 비단 회화를 위한 법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것을 회화에 옮겨낼 도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일종의 합치이며 부분과 부분이 어울려 전체를 이루는 화음과도 같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화음은 “숫자가 만들어내는 규칙, 일정한 관계의 배치로 실현된다“는 그의 말은 순수학문의 영역에 갇혀있던 수학, 과학을 예술과 현실의 영역으로 옮겨오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예술과 수학, 과학의 병합을 이뤄냈을 뿐 아니라 순수학문(당시에 artes liberales라 부른 귀족들의 학문)과 통속영역(artes vulgares, 예술과 기예 등 노동계급의 재주)의 경계를 위반함으로써 학문적 성취가 일상의 영역에서 실천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러 저술서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소명의식은 자신의 분석 및 이론이 결국 그의 가족, 도시, 더 나아가 국가가 문화적, 역사적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융복합적 사고의 기반을 더 나은 공동체 건설이라는 실용주의적 목표의식에 두고, 고전을 바탕으로 한 깊은 이해력과 통찰력을 활용하여 서로 다른 분야의 분석틀을 접목해보는 것, 이를 통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신선한 새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실천하는 것. 이러한 알베르티의 면모가 우리 시대 대학교육 및 학생 여러분의 미래설계에 있어 훌륭한 참조점이 되지 않을까요.
제 678 호 [사설] 현대 사회와 프로스포츠의 파급력
프로 스포츠의 역사는 고대 올림피아 제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고대 로마에서도 직업경기가 행하여 지기도 했으나 현대의 프로스포츠와는 그 사회적 기반에서부터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경기에 상금제도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1714년 영국의 앤여왕이 경마에 10기니의 상금을 걸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초까지는 스포츠에서의 상금은 프로페셔널리즘으로 간주 되지는 않았다. 상금을 거는 것이 프로페셔널리즘으로 해석하게 된 계기는 영국의 보트와 육상경기에서 아마추어 규칙이 성립된 뒤부터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은 18세기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처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신흥 부르조아 계급은 귀족지주와 대등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하여 이들과 함께 여러 경기에 상금을 걸고 내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달리기나 보트경주 등도 예외가 아니어서 상금이 붙은 경주가 페데스리트리어니즘이라는 이름으로 18~1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이러한 프로 스포츠는 20세기 미국과 유럽에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즉 프로야구(MLB), 프로농구(NBA)와 미식축구(NFL)를 중심으로 각종 프로 스포츠 리그가 창설되면서 관람 스포츠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으며, 20세기 후반 NBA의 마이클 조던, MLB의 페드로 마르티네스, NHL의 웨인 그레츠키와 같은 슈퍼스타들이 탄생하면서 스포츠는 더 이상의 자체만의 산업이 아닌 타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산업으로 진화하게 된다. 유럽 또한 20세기 초중반부터 프로축구 활성화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잉글랜드의 EPL, 이탈리아의 Serie-A,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그리고 독일의 분데스리가를 중심으로 유럽전역의 프로팀을 대상으로 한 챔피언스리그, UEFA 리그를 운영함으로써 전 세계를 축구라는 단일 종목의 매력에 빠져들게 했다. 이러한 시너지는 ‘FIFA 월드컵’의 엄청난 경제적 효과 창출과 흥행으로 이어졌다. 최근의 추세는 IOC가 주관하는 동.하계 올림픽 보다 단일 종목인 축구 월드컵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이 오히려 높은 수준임이 분명하다. 아시아지역에서는 1936년 일본 야구 프로리그의 출범을 시작으로 야구, 축구, 농구 종목을 중심으로 각국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한국 스포츠 또한 이러한 추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1982년 프로야구(KBO)를 시작으로, 1983년 프로축구(K리그), 1997년 프로농구(KBL) 인기종목 중심으로 프로화가 시행하고 있으나 경기력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다소 부족함이 있는건 사실이다. 이는 프로스포츠 리그 구단의 투자 및 운영 노하우 부족, 우수 선수들의 해외 리그 진출 등에 기인한다. 향후 프로 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확산되는 추세와 병행하여 더욱 더 신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사회의 구성원인 대중은 위락성 높은 대중문화를 즐겨 사용함으로써 고도로 조직화 되고 기능화된 지식사회의 구조적 특성으로부터 파생되는 정신적 긴장, 심리적 불안, 공격성 문제를 해소하려는 성향을 가지게 되며 스포츠라는 매개체는 타 영역에 비하여 이의 해소에 가장 적합한 영역이다. 프로 스포츠는 복잡한 조직사회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스포츠 관람을 통해 각종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생활의 활력소로써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즉 프로 스포츠는 대중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로 스포츠가 내재하고 있는 위락적 기능 또한 대중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상황 요인으로 작용하며, 대중이 동류의식을 갖도록 융합시키는 사회통합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프로 스포츠는 일반 대중에게 지역적 연대감을 형성하여 대중의 소속 본능과 지역적 연대감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사회 결속을 도모하게 한다. 또한 프로 스포츠는 아마추어 선수에게는 장래에 대한 진로 개척과 함께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여 선수의 사기향상에 도움을 주며 경기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여 경기력 향상에 이바지하는 등 아마추어 스포츠계의 활성화를 촉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프로 스포츠의 흥행은 관련 산업의 호황과 새로운 직종의 탄생이라는 궁극적 경제 발전 및 고용증대에 이바지 하며 이는 국가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프로 스포츠의 발전과 지속적 대중화는 대중들의 스트레스와 공격성 해소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 스포츠에 대한 흥미성 증진이 개개인의 생활체육 활동 참여로 이어져 궁극적 복지 실현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점, 국가와 지역에 대한 연대감 형성을 가능케 하고, 국가 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가 가능하다는 점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효과로 말미암아 향후 구기종목을 중심으로 한 프로 스포츠의 발전은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며, 사회적, 경제적 파급력 또한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 678 호 [기자석]"다리는 있고 머리는 없는" 소득주도성장, 머리까지 위태롭다
녹색성장과 창조경제에 이어 소득주도성장은 한 정권의 경제정책을 조롱하는 상징이 되었다. 전 국민적 열망에 힘입어 최저임금 인상을 중심으로 소득주도성장은 순항하는 듯 했다. 그러나 지금 소득주도성장은 좌초된 것처럼 보인다. 기업, 보수성향 언론과 야당의 집중공격을 받으며 소득주도성장은 괴상한 것으로 변모했고, 정부와 여당은 자가당착에 빠져 동력을 잃고 말았다. 소득주도성장은 한국의 기울어진 경제구조를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윤주도에 의한 친자본적 성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와 함께 침체되었고 이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임금주도에 의한 친노동적 성장이다. 소득의 불평등과 금융 탈규제라는 문제를 지적하며 국내 케인즈주의자들은 부패와 수출이 주도하는 한국 경제체제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스트 케인주의자들은 임금이 증가하면 노동생산성도 증가해 자본성장이 가능하다는 공식까지 이끌어냈다[Δy(노동소득분배율의 성장률)=Δw(1인당 임금 성장률)-Δp(노동생산성의 성장률)]. 이와 함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 최저임금인상, 고용보장 등의 노동정책과 금융규제, 임금분배이다. 소득주도성장은 2014년 즈음 한국 정치 전반에 등장하면서 정치 진영을 불문하고 지지를 얻었다.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가계소득 중심의 내수부양”을 강조했고,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소득주도성장, 새로운 변화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소득주도성장은 진보, 보수 경제관에 의해 방향이 엇갈리기는 했으나 전반적인 이론 기조는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한편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자리 잡지 못하자 2015년 국회 토론회에서 사회자가 “머리는 있지만 다리가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 현재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을 거시 담론으로서 여기고, 이를 추진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성은 1인당 산출량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집합적 노동 개념이다. 또한 은행과 정부의 정책, 기술혁신, 국제정세 변화로 인해 소득주도성장 체제에서도 성장이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정부는 이런 거시적 담론으로서의 소득주도성장에 접근하지 못했을 뿐더러,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부족했다. 최저임금 1만 원 정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내유보금 과세, 기업 간 갑을관계 해소, 재벌개혁 모두 실패했고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노동법 개악, 친기업 정책, 긴축재정 추진으로 계급 간의 간극을 더 벌려내기만 했다. 소득주도성장의 근본적 지향을 외면한 채 스스로 소득주도성장의 다리를 잘라낸 것이다. 양극화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인한 필연적 결과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빈곤문제를 외면하는 것이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상대빈곤율이 3번째로 높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규제가 매우 부족하고, GDP 대비 투자하는 복지비용이 11%로 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하다. 주거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국민 50%가 무주택자지만 임대주택은 10%, 빈집은 5%이다. 그럼에도 주거비는 시장이 정하고 소득주도성장을 외치는 정부와 서울시는 분양주택 공급정책만 펼치고 있다. 청년들은 주거난에 허덕이지만 기업과 부동산 투기자들은 배를 두들긴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면서 소득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것은 연목구어이다. 따라서 정부는 기업 중심의 ‘혁신’에 포커스를 둘 것이 아니라 후보자 시절 부르짖었던 사람 중심의 ‘복지’를 확대하고 본래의 소득주도성장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좌초된 소득주도성장을 살릴 유일한 길이자 노동,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다. 이해람 기자
제 677 호 [책으로 세상 보기] 4, 67, 7834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 빼앗긴 자들을 위한 탈환의 정치학 저자 채효정 출판사 교육공동체 벗 4, 67, 7834. 현 한국 사회의 대학생은 스스로를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성인이라니, 칭찬이더라도 누군가 나를 그렇게 칭한다면 낯이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수많은 교수 역시 스스로를 지성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단에 올라 연구, 강의하는 교수도, 이들에게 교육받고 토론하는 학생도 지성인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지성인은 누구인가? 이 책은 경희대학교 시간강사였으나 ‘해촉’된 채효정 해직강사가 경희대학교 캠퍼스 내 잔디밭에서 진행한 강의 내용을 토대로 쓰였다. 인문주의를 표방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는 모순적이게도 기업화가 거듭 진행되다가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 대학 재정난을 이유로 67명의 시간강사를 일방적으로 해고했다. 4, 67, 7834. 67명의 시간강사가 해고된 지 4년이 지났다. 촛불이 일어났고, 정권이 바뀌었다.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올해 8월, 전국 대학에서 총 7,834명의 시간강사가 실직했다. 촛불은 혁명이 될 수 없었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지도 못했고, 대통령만 바꿔놓았을 뿐 저항의 바람이 일터, 학교까지 불어오지도 않았다. 저자는 대학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 대학의 현실을 면밀히 진단한다. 지성인을 길러내야 할 대학에 왜 지성인이 단 한명도 없는 것인가. ‘대학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저자가 진단한 대학에는 놀랍게도 노동도, 학생도, 교수도, 교육도, 정치도, 주인도 없다. 노동하는 사람은 있으나 ‘노동자’는 없고, 배우는 ‘고객’은 있지만 ‘학생’은 없다. 사회에 유의미한 담론을 제시하고 모순구조를 지적해야할 대학의 역할은 온 데 간 데 없고, 돈을 따내기 위한 비즈니스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정부, 기업, 교육기관을 순환체로 두며 굳건해지고, 수많은 조민을 양산한다. 우리 모두 힘들다라는 자각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왜 힘든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바꾸어야하는지는 배운 적도 없고 고민도 부족하다. 저자는 대학에서, 나아가 사회에서 모든 이들이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빼앗긴 대학을 탈환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 학생, 교수가 함께 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는 대학을 교육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실현하기 위해서 저자는 생각하지 말고 행동 먼저 하라고 조언한다. 행동은 생각을 촉구하지만 생각은 행동을 유보토록 한다. 거듭된 실천 속에서 가치판단의 준거가 발생한다는 진리를 반영하고 있다. “편에 서서 선을 넘자” 대학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홀로 선을 넘으면 잡범이지만 모두가 선을 넘으면 저항이다. 구성원 모두가 정치적 주체로서 연대하여 편에 서고, 함께 대학과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여 선을 넘자. 이해람 기자
제 677 호 [교수칼럼] 늠름하고 아름다운 우리 땅 ‘독도’, 반드시 수호해야
윤지원 교수 (국가안보학과)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외교안보 상황 하에서 우리군은 ‘동해영토수호훈련’을 실시했다. 지난 8월 24일과 25일 이틀간 훈련에 대해 국방부는 “이번 훈련은 우리 영토 수호를 위한 정례적인 훈련으로 특정 국가나 특정 세력이 대상이 아닌, 우리 주권, 영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거나 또는 침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훈련”이라고 강조했다. 독도 훈련은 1986년부터 1년에 두 차례씩 독도 방어 의지를 보여주고, 외부 세력의 독도 침입을 차단하는 전술을 숙달하기 위해 해군, 해경, 공군 등이 참가하는 일종의 방어훈련이다. 작년에는 6월 중순과 12월 초에 실시됐다. 올해 훈련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훈련 시기인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직후에 실시됐다. 훈련 명칭은 기존의 ‘독도방어훈련’에서 ‘동해 영토수호훈련’으로 변경됐고, 훈련 규모가 상당했다. 이지스구축함·육군 특전사 병력 등이 동원됐고, 이틀째에는 일본 극우단체 선박 등이 무단으로 진입한 상황을 가정해서 해경 경비함정 4척, 해군 함정 5척 등이 투입된 훈련을 실시했다. 2차 훈련 시기는 곧 정해질 예정이다. 예상대로 우리군 훈련이 끝나자마자 일본의 거센 비난이 이어졌고 맞대응하듯이 일본 자위대가 미 육군과 한 달 동안 전시증원 연합훈련에 들어갔다. 미·일은 이례적으로 연합훈련을 공식화했다. 미·일 전시증원 연합훈련은 “유사 시 미군 전력이 투입되는 절차 등을 훈련하는 것으로 미 본토 또는 하와이, 기타 지역에 있는 미군들이 현장으로 증원하고 전개하는 전반적인 절차를 연습하는 훈련”이다. 그동안 미·일 정례 합동훈련은 주로 일본 동북부에서 실시됐지만 이번에는 부산과 3백km 떨어진 우리 영토와 가장 근접한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훈련에 들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독도 영공 수호를 포함해 튼튼한 국가안보 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지난 7월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영공을 2차례나 침범한 사례가 발생했다. 우리 공군의 군사적 대응은 단호했다. 러시아의 독도 무단 영공 침범에 즉각적인 경고 사격을 가했다. 러시아는 우리와 1990년 9월 30일 수교 이후 2008년 9월부터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갑작스런 이런 독도 침범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이고 용납할 수 없는 주권 침해 행위”이다. 정부는 러시아의 군사적 도발 행위에 대해 엄중한 항의와 재발 방지 약속을 촉구했다. 동북아 지역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독도는 동도와 서도, 바위와 암초로 구성된 우리 고유의 땅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다. 대신 연중 방문할 수는 없는데, 기상악화로 파고가 높을 경우 독도 방문이 제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며, 방문 시간은 대체로 30분 내외다. 필자는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으로 몇 년 전 국방부 제공 군수송기를 타고 다녀왔다. 독도의 땅을 처음으로 밟았던 그 감동적인 가슴 뭉클했던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독도의 날’을 기억했으면 한다. 역사적으로 1900년 10월 25일에 고종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공포했다. 공식적인 국가기념일은 아직 아니지만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2000년 독도 수호 운동을 하고 있는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가 독도의 날 지정을 제안한 이후 2010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독도학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민간 차원에서 독도의 날을 선포했다. 이어 2004년 울릉군이 ‘울릉군민의 날에 관한 조례’를 통해 10월 25일을 ‘군민의 날’로 정했고, 경상북도 의회는 2005년 6월 9일 조례안을 가결하여 매년 10월을 ‘독도의 달’로 지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반면 독도에서 가장 근접한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2005년부터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명칭)의 날’을 제정해서 매년 2월 22일에 기념행사를 개최 중이다. 또 일본은 2008년 7월 14일 공식적으로 독도가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는 주장을 교과서에 명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미 보도됐듯이, 일본은 2020 도쿄 올림픽, 패럴림픽 조직위원회의 홈페이지에서 일본열도 지도에 독도와 쿠릴열도 4개(러시아와의 해양영토 분쟁 지역)의 섬을 자국 영토로 표기했다. 일본의 이런 터무니없는 독도 영유권 주장을 우리는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강조하자면 독도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이다. 또 일본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정부는 국가의 주권과 안위를 보호하기 위해 독도에 대한 어떤 도발이나 무단 침범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국민의 독도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하며, 우리군은 전방위 해양안보 위협에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하기위해 해양력 강화에 더욱 주력해야한다.
제 677 호 [사설]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화합의 길은 이리도 험난한 것인가? 나라 안팎으로 무역 분쟁, 국가간 갈등, 보수와 진보간의 균열 등으로 시끌시끌하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북정책, 소득주도성장으로 파급된 경제정책,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이 끝이 없다. 우리나라의 중심부라 할 만한 광화문. 어느덧 모든 희망과 욕망의 분출구이자 집결처가 된 광화문광장에서는 상시적으로 기습집회가 열리고 있다. 자고 나면 시위를 위한 천막이 늘어나 있고, 확성기 소리는 높아져 있다. 참다운 소통과 휴식의 공간이 되어야 할 ‘시민의 품’이 시위의 현장이자, 천막농성의 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광화문은 수많은 군중의 민의가 모이던 곳이요, 우리나라의 초기 민주주의가 싹터 나오던 곳이다. 광화문에서 덕수궁 앞 시청까지 이르는 길은 최초의 시민단체로 출범한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민의를 수렴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근대적 의회설립을 허락하지 않는 고종황제를 상대로 정치적 투쟁을 벌이던 곳이요, 이름 없는 필부들이 돈을 갹출하여 시위대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며 민의를 성숙시켜 나가던 곳이요, 그 결과 의회설립을 허락받아 근대적 시민사회로 한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된 상징적인 곳이다. 당대 역사는 인민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안착되지 못했지만, 진보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구호와 열망이 폭발적으로 움터 나오던 곳이다. 그 역사를, 역사의 현장을, 역사의 정신을 ‘촛불혁명’이 이어받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더 나은 사회, 품격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하나가 되었던 광화문은 지금 갈기갈기 찢어진 채 분열되고 있다. 세월호 추모 천막을 둘러싼 갈등에 이어 우리공화당의 천막, 민노총의 천막처럼 상시적인 것 외에도 정치사회적 이슈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천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천막정치’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시민들의 울화감, 냉소, 정치적 외면, 상대편에 대한 공격성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혹자는 “광장은 이념과 성향을 떠나 모든 시민이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념과 성향이 다른 각각의 집단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무분별하게 농성하고 광장을 점유해도 괜찮은 것인가? 시민의 권리라는 이유로 냉대와 야유와 고함질은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을 조율해 나갈 지혜로운 해법은 없는 것인가? 달리 생각해보면 이는 비단 광화문광장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직장이나 대학사회 내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고, 발생되는 불협화음들이다. 근무연차가 다르고, 위계가 다르고, 소속과 계열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생각과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상대를 짓밟고 무시한다. 상대가 가져갈 이득 보다 내가 챙겨야 할 권리와 이득이 더 중요하다. 소속집단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놓은 동량들은 무책임, 무원칙, 무소신으로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하다. 규정은 있으나 마나요, 온갖 집단에서 갑질이 난무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려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바깥세상 역시 민족주의의 파고를 넘어 세계시민주의로 나아가자 제창하건만 역사는 진보하지 못하고 되레 뒷걸음쳐 무수한 갈등을 뿌리내린다. 미중간의 무역전쟁은 세계경제 침체위기로 이어지고 있고, G2 국가간의 대립은 신판 제국주의의 충돌이라 할만하다.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로 촉발되기 시작한 한일간의 갈등은 외교를 넘어 경제로, 안보문제로 증폭되고 있다. 이 와중에 일본은 헌법을 수정하여 ‘보통국가’의 길을 걷고자 한다. 사실상 군사대국화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 한말의 정국을 보는 듯 끔찍한 기시감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린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다시 서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수많은 관료들의 무책임도 문제였지만, 급변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고종의 온유한 리더십이 더 큰 문제였다. 우선 우리 안의 균열과 대립이라도 마감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열의 언어와 작별하여야 한다. 다름을 이유로 거부하고 차별하는 편협한 사고를 경계하여야 한다. 교묘한 언어적 수사의 가식성에 대해, 도덕의 가면을 쓴 위선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의식으로 사회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청년층이 두터워야 한다. 깊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대립과 갈등, 균열, 전쟁과 같은 싸움을 종식시킬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리더십이 소환되어야 한다. 치열했던 여름은 가고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시작’에는 모두의 희망이 담겨 있다.
제 677 호 [상명만평] 물러설 수 없는 전투
만화학과 황인선
제 676 호 [상명만평]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황인선(만화 3)
제 676 호 [교수칼럼] 완벽한 교수, 그저 그런 교수
배희분 교수 (복지상담대학원 아동청소년상담학과) 아동과 청소년의 심리적, 행동적 문제를 다루는 상담실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부모의 말은 “선생님, 도대체 우리 애가 왜 저러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유를 좀 알려주세요!”라는 간절한 호소일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상담이 수많은 고비를 넘어 드디어 “아하, 우리 아이가 아니라 제가 문제였군요. 제가 더 좋은 부모가 돼야겠네요!”라는 부모의 고해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자녀 문제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부족하던 부모가 문제에 있어 자신이 끼친 영향력을 알게 되고 깊이 깨우치게 되었는데, 왜 ‘모든’ 경우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부모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자녀의 ‘문제’보다는 아이와 부모 간의 ‘관계’에 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사람들이 상담실에 올 때 가지고 오는 호소문제들은 보다 근원적인 갈등이나 어려움이 현실과 일상에 표출되는 일종의 증상에 불과한 일이 많다. 여러 가지 상담이론들 중에 인간사에 있어 온갖 어려움이 모두 관계에서 오는 것이며, 관계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욕구라고 보는 이론이 대상관계이론이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부모와의 초기 상호작용에서 경험한 것들이 자녀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이 그 사람의 이후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즉 태어나서 맨처음 만나게 되는 양육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전 생애에 걸쳐 타인을 지각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본적인 구조가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대상관계이론의 중요한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인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생전에 엄마와 아이 약 6만여 쌍을 관찰하고 연구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아이를 망치고 힘들게 하는 엄마는 놀랍게도 우리 모두가 이상적이라 여기는 완벽한 엄마(perfect mother), 즉 자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 안은 채 모든 필요를 앞서서 미리미리 채워주는 엄마라고 일갈했다. 위니컷에게 있어 좋은 엄마는 퍼펙트 마더가 아니라, 아이에게 사랑과 돌봄도 주지만 동시에 살다보면 으레 겪을 법한 적절한 좌절도 주는 엄마인 굿 이너프 마더(good enough mother),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저 그런 엄마’, ‘그냥 괜찮은 엄마’, 혹은 ‘그만하면 충분한 엄마’라고 결론 내렸다. 사실 완벽한 부모란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완벽해지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쏟다보면 정작 그러한 노력이 목적해야 할 자녀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진짜 좋은 엄마는 아이에게 적당한 좌절을 주어서 그 좌절을 통해 자녀가 자신만의 힘을 발견하고 독특한 자기 색깔을 가지게 해주는 엄마다.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지 않는 엄마, 그저 늘 그 자리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은 엄마, 아니 바쁠 땐 가끔 자리를 비우기도 하지만 곧 돌아올 거란 믿음을 주는 엄마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가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문득 자녀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그 문제에 대한 이해도 통찰도 없었던 부모가 상담을 통해 부모로서 자신이 부족했음을 깊이 깨우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의 자녀 문제가 나아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더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자칫 굿 이너프 마더가 아니라 퍼펙트 마더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적 결심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아이의 욕구를 다 채워준다는 미명하에 실은 부모 자신의 욕구를 자녀에게 투사하는 부모가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그들은 흔히 “도대체 뭐가 문제니?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잖아.”라고 말한다. 어려운 형편에 비싼 개인 과외며, 바이올린 교습이며, 발레수업을 시키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것도, 심지어 고기 먹고 나면 반드시 밥도 한숟갈 먹어야 속이 편하다며 도리질하는 아이 입에 밥을 떠먹이곤 했던 것까지도 실은 자녀의 욕구와는 거리가 먼, 투사된 자신의 욕심이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위험은 비단 부모-자녀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자칫 퍼펙트 프로페서가 되고자 하는 욕구로 자신과 제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의 사랑과 칭송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교수, 존경받는 교수가 되기 위해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밀어붙이다 보면 자신의 욕구와 제자의 욕구를 혼동할 수도 있고, 가시적으로 보이는 업적과 성과를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대학교수는 높은 윤리적 잣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직종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오히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좋은 관계의 기본은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좋은 자질과 함께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까지도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교수에게도 필요하다. 강의평가는 우수하지만 논문쓰기가 어려운 사람도 있고, 연구 업적은 뛰어나지만 학생들과 소통이 유난히 힘든 사람도 있다. 자신의 굿(good)과 배드(bad)를 잘 통합하여 인식하는 교수가 학생들의 굿과 배드도 통합하여 볼 줄 알며, 이렇게 통합된 사제관계 속에서 비로소 교수는 학생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저 그런 교수, 그만하면 충분한 교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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