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0 호 [사설] 헤아림의 결핍, 헤아림의 미덕
사회가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할수록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합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탓이기도 하지만, 가치의 충돌로 인해 사람들의 감정이 격앙된 탓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세상은 더 넓어졌으나 시야는 더 좁아진 느낌이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현명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가치의 실종 시대에 모두가 극도로 피로한 상태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은데 가슴이 답답하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이들이 나갈 길을 생각하면, 마치 안개라도 자욱하게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려져서 미안하다. 이 안개를 걷어낼 시원한 바람은 언제쯤 불어올까. 사막에 한 두 방울 물이 모여 오아시스를 이루고 수많은 생명을 키워내듯 우리가 또 다시 꿈을 품을 방도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꿰매져야 한다. 우리는 왜 이리도 분열된 지경에 처하게 됐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헤아림의 결핍’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가치의 실종 시대에 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사람도 있고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누구도 나무만 본 적이 없고, 누구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선이고 상대는 악이라고 말한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무리에 대해 가차 없이 공격을 해댄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편 무리에 서있는데 그 많은 이들을 무슨 권리로 무시할 수 있을까, 그들이 왜 반대를 하는지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일까. 타인에 대한 헤아림의 결핍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을 외면하는 일이 아닌가. 진심으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말이 상대를 몰아세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상대를 몰아세우기에 급급하다. 누군가는 촛불을 들었고, 또 누군가는 태극기를 들었지만 국민을 앞세워 또 다른 국민을 모욕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정치인들이 너무 쉽게 쓴다. 반대 의견을 가진 다수의 국민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헤아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헤아림의 결핍이 극에 달한 모습이다. 상대를 무시하면서 자신만 옳다고 말하는 불통의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이성은 마비되고 마침내 분노하거나 좌절하고 말 것이다. 말할 자유를 이런 식으로 누려서야 되겠는가? 소음에 가까운 말을 여기저기 퍼뜨리며 그러한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상황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리는 데만 열중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며 따르는 사람들만 생각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모욕한다. 진영의 이분법과 선악의 이분법이 팽배해진 이 시대에 각자 자기 말만 늘어놓으면서 국민을 거론하는 이 무책임함과 오만함을 대체 어찌 해야 할까. 국민을 앞세우기 전에 지금의 분열된 상황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이성적으로 논리를 따져 무엇이 정의로운 일인지 모색하고 숙의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꿈을 이루며 희망을 담보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헤아림의 미덕’이 필요하다. 반성도 없고 헤아림도 없는 현실 앞에서 청춘들에게 한없이 부끄럽지만, 우리의 청춘은 헤아림의 결핍에 빠지지 말고 인간이기에 끈을 놓으면 안 될 존엄성의 가치를 중시하기 바란다. 극복해야 할 일과 이루어야 할 일이 있을 때 상대를 누르며 이기겠다는 전략 말고, 상대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며 토론을 끌어내고 문제의 본질과 자초지종을 논리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지성이기를 바란다. 헤아림의 미덕과 함께 빛나는 지성을 갖춘 우리 젊은이들이 미래의 상생 사회를 열어가기를 기도한다.
제 680 호 [상명만평] 이 별들은 우리 꺼다
황인선 (만화 3)
제 679 호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
영화 <김복동>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확 불타올랐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사그라진다. 그리고 그 대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 모든 사회적 이슈가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문제 역시 막 대두하기 시작되었을 때에는 세계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싸움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점점 지쳤고 ‘위안부’라는 이 세 글자는 누군가의 관심 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줄 로만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면 전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김복동’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서 잘 알려주고 있다. 수요시위에 관한 이야기, 대사관 시위에 관한 이야기, 평화나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소녀상과 한일 ‘위안부’ 합의에 관한 이야기. 영화 ‘김복동’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김복동 할머니를 통해서 풀어낸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김복동 할머니의 일생의 일부를 담아내고 있다.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힌 뒤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 며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 밝혔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노력과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노력, 같이 싸워주었던 시민 단체와 학생들의 노력 끝에 일본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일본이 취한 조치는 사죄가 아닌 ‘협정’이었다. 협정은 할머니들의 의지와 의견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할머니들은 협정 사실과 협정의 내용을 뉴스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부는 할머니들을 앞세워 배상금을 받아냈지만, 그 배상금을 아직도 할머니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있 다. 그리고 돈이 아닌 사과를 요구했던 할머니들에게 일본은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1991년 첫 증언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로 수년간 많은 사람이 싸워왔지만 아직도 일본의 사과는 못 받아낸 상황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올해 1월,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건강이 안 좋아 병실 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남긴 말씀은 ‘집에 가야 한다.’였다. 집에 가야 한다고 할 일이 아직 남았다고,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 남아있는 그 ‘할 일’은 누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일까. 방효주 기자
제 679 호 [책으로 세상 보기] 누군가의 몸이 눈사람이 되지 않길
작별 저자 한강 외 6명 출판사 은행나무 누군가의 몸이 눈사람이 되지 않길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왜 하필 주인공은 눈사람이 되었을까?’ 사실 소설의 제목이 ‘눈사람’이라고 착각될 만큼 소설 속 ‘눈사람’이란 단어는 수없이 나오고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한 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눈사람의 묘사는 모두 주인공의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녹아내리기도 하고,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부서져 버리기도 했다. 주인공은 소설의 처음부터 싱글맘, 학교폭력, 노동자의 삶과 같이 힘겨운 현실 문제를 마주하며 살아가는 무기력한 존재로 그려졌다. 따라서 매 순간 언제 놓아버릴지 모르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느끼고 어떤 사회적 또는 심리적인 요소에 의해 결국은 한없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한정적인 존재인 주인공의 모습을 눈사람을 통해 나타내고 싶던 것이 아닐까 한다. 소설을 한 번 읽은 후에는 눈사람이란 강렬한 소재에 갇혀 제목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결국 소설의 큰 내용은 ‘작별을 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아들에게, 사랑했던 연인에게,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고 통화를 하고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는 동안 소중했던 사람들과 떠나기 전 인사를 했다. ‘작별’의 사전적 의미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인데, 수동적인 뜻을 포함한 ‘이별’의 의미와는 달리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마치 주인공이 소멸되기 직전의 행동들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준비된 담담한 작별이란 것을 의미하는 듯 말이다. 눈사람이 결국엔 녹아 없어진다는 것은 주인공 또한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으로 인한 것인지 스스로 놓아버린 죽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현실에 더 이상 미련 없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쓸쓸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사실 소설 속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찾아낸 의미들이 아닐 수도 있다. 왜 눈사람이 되었고 주인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 그 의미 속에서 느끼는 우리 삶의 의문들, 순간의 공포심들일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 눈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는 어느 순간 눈사람이 되어도 놀라지 않고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인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소멸되기를 바라는, 어쩌면 스스로 눈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봐야 한다. 언젠가는 견딜 수 없는 사회의 현실과 부딪힐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에. 송수연 기자
제 679 호 [기자석] “지성을 박탈당한 대학” 교수는 무지, 학생은 무감
연세대학교 류석춘 교수가 대학 강단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부’로 폄훼하고 학생들이 성희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이 발언은 사회학과 전공 수업인 ‘발전사회학’ 강좌에서 나왔다. 사회학 권위자 중 한 명이 역설적으로 사회학의 본질을 오도한 것이다. K대학교 모 학생이 조국 딸 부정입학 논란과 관련하여 교수들이 나눈 이야기를 증언했다. 교수들은 “걸리지만 않으면 문제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주제를 바꿨다. 그 후 꺼낸 이야기는 “지인의 아들이 K대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공 교수이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학생은 충격적이었다고 전했다. 자신은 “3년간 학생부 종합전형을 준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는데, 이렇게 쉽게 이른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다니...”라고 한탄했다. 이 두 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지성인’으로 여기는 교수 역시 엘리트주의와 계급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회학과, 강좌는 ‘발전사회학’임에도 교수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젠더문제에 대해 무지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또한 K 대학 교수들이 입시부정과 관련해 대학생들 앞에서 꺼낸 말들을 듣고 ‘경악’할 수밖에 없다. ‘일부’ 교수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부정은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며, 이어서 나온 이야기 역시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물론 그들은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학문에 정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교수라는 계급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대학은 지성을 빼앗겼다. 계급성을 이해하고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는 지성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교수이자 권위자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약자를 조롱하고, 권력을 대물림하는 이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대학은 교수가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과 의사소통하도록 강의와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게 ‘영업사원’으로 만들었다. 돈이 되는 정부와 기업의 프로젝트를 따와야만 교수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만든 것이다. 대학이 지성을 빼앗기자, 교수 역시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생들도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다. 학내에서 학생들은 ‘정치적인 것’을 두려워하고 꺼려한다. 파산당한 명지대 총학생회, 조국 사퇴 집회를 주동한 서울대와 고려대 총학생회 모두 ‘탈정치’를 외쳤다. 정치적인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오해하고 두려워한다. 청년들이 ‘박탈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계급성과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학생들은 서로를 공감, 이해하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한다. 사회로부터 목 죄인 탓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주체로서 청년이 멸종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또한 부정입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발하면서 이원 캠퍼스나 평생교육원 학생들을 무시하는 학내 분위기는 결코 고학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사회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 없이 학벌주의만을 고수하겠다는 태도는 앞서 언급한 교수의 모습과 닮아있다. 지성을 잃고 정치가 사라진 대학은 ‘대학’으로서 기능을 잃는다. 우리 사회 안에서 누구보다도 유식한 교수는 무지하고, 학생은 사색 없이 무감하다. 학계의 권위자여도, 이른바 ‘최상위권 대학’이어도 그 사람의 지성을 판단할 때 사회적 위치와 경험, 공감능력과 연대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으로서 기능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먼저 권위자와 엘리트의 차별의식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무지하고 무감한, 무용의 대학을 우리의 것으로 되찾는 길이다. 이해람 기자
제 679 호 [교수칼럼] 쓸데없고 시시한 이야기가 그리운 오늘
김은경 (글로벌경영학과 교수) 낭만적이라는 표현은 때로는 터무니없이 현실을 모르는 이에게 팔꿈치로 옆구리를 슬쩍 치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처럼 낭만이 그리운 때도 없다. 날마다 정치면 기사는 피로감을 더해주고 우리는 새로운 날의 새로운 소식을 기다려본다. 속절없이. 오늘 나의 메이트 포털은 ‘자디그 앤 볼테르(Zadig & Voltaire)’가 84% 세일을 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큰 폭의 세일이지만 여전히 그 숫자에서 한 자리를 빼도 선뜻 구매의욕이 일어나지 않는다. 금전적 부담이 아니라 취향 탓이라 해두자. 이 브랜드명을 알게 된 경위는 이렇다. 원래 프랑스의 한 장관이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디그 드 볼테르(Zadig de Voltaire)’라는 말 대신에 ‘자디그 에 볼테르(Zadig et Voltaire)’라 답하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이야기를 들어서이다. 말인즉 ‘볼테르’라는 작가가 ‘자디그’를 써서 ‘볼테르의 자디그’라 해야 했는데 유명 브랜드명이 장관의 입에서 먼저 나와 버린 것이다. 철학서의 위엄과 함께 자신의 위상을 뽐내야 하는 그 시점에서 패션 브랜드명을 쏙 내뱉고 말았으니 입방아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이 이야기가 얼마나 고소한 안줏거리가 되었을까. 아, 그리고 말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어찌 놓치겠는가. 그 자리에서 폭소를 터트리는 대신 이 장면을 돌려보고 두고두고 숨 고르며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권위자의 어이없는 실수는 바다의 물결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안겨준다. 기대가치를 뒤엎는 뜻밖의 전복은 낭만적 아이러니의 대표적 사례이다. 진지함이 과도할 때 바늘귀만한 무지의 구멍은 아이러니를 극대화하고 많은 이들에게 무장해제와 더불어 끄윽끄윽 웃음보따리를 선물한다. 고전 작품과 연관된 위정자의 재미난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다. 17세기에 출판된 『클레브 공작부인』은 당시로는 앞서간 심리소설이다. 2006년에 내무부 장관이었던 사르코지는 이렇게 오래된 연애소설이 국가고시 시험문제에 출제되는 게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언급을 했다. 심지어 출제자가 멍청하거나 사디스트 기질이 있어 그랬을 것이라는 둥, 노동자층에겐 수용불가라는 둥, 작품 폄하에 차별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후 사르코지가 2009년에 또 한 번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의 과거 발언이 환기되었고, 이에 대한 대중의 반발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즈음 그의 국가정책도 발언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프랑스 국민이 너도나도 反사르코지의 아이콘이 된 이 책을 사서 읽는 바람에 한때 서점가에선 이 책의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책은 출간된 지 330여 년 만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정말 소소한 일에도 가히 혁명적인 사람들이다. 그쪽 나라도 정치인들의 부패와 비리에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나 가뭄에 비 내리듯 입가에 미소를 떠오르게 해주는 에피소드가 밝은 회색과 진한 회색 사이의 정치 채도 가운데 간간이 숨을 트이게 해준다. 싸움을 하되 싸움이 끝난 뒤 흙탕물이 튄 서로의 옷을 털어주는 매너의 장면을 언젠가는 보았으면 좋겠다. 너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보이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이상적 차원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파리의 노트르담』에선 흉물스럽고 일그러진 수성(獸性)에서 숭고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위고의 극작법이 잘 드러나 있다. 잘생긴 풰뷔스를 나의 태양이라고 부르는 에스메랄다의 눈엔 콰지모도의 순전함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는 세상의 이치라 패스한다 치자. 그렇지만, 그래도 위고는 콰지모도라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낭만주의의 이 극적인 갭은 감성을 자극하고 심금을 울리게 한다. 오늘 나는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을 또렷이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를. “여보세요! 낭만은 픽션에서나 찾으세요!” 누가 곁에서 옆구리를 쿡 찌른다.
제 679 호 [사설] 대한민국과 정의사회
오래 전부터 인간은 공정성에 기초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갈망해왔다.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 국가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며 사회적 직분의 선발과정을 강조했다. 그는 국민을 세 부류로 공정하게 선발하여 각각의 임무를 부여했다. 그중 올바른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 국가운영을 책임지도록 선발된 최상위 엘리트계층에게는 사유재산은 물론이고 친자 양육권까지 박탈한다. 정치·사회의 지도자가 사리사욕에 얽매여 공정성을 훼손하면 정의사회의 실현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 이러한 구상은 인권 침해적 조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랜 이론탐구와 실무를 거쳐 최종 선발된 위정자에게서도 이기심 극복은 어렵다는 플라톤의 고민이 엿보인다. 공정과 정의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플라톤 이후에도 지속되어 지금은 3권 분립에 기초한 대의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널리 확산되어 있다. 서양에 비해 민주적 정치이념을 다소 늦게 접한 대한민국도 지난 한 세기 동안 갖은 내우외환을 거치며 국민의 주권에 민감한 신흥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정치이념을 서로 달리하는 정당들은 각기 정책과 공약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정의사회란 다름 아닌 기회의 평등과 사회적 경쟁을 수반하는 선발의 공정성이 지켜지는 곳이다. 따라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는 새 정권의 선언적 약속에 사회정의를 갈망하던 국민의 가슴은 설레었을 것이다. 문제는 평등과 공정성 같은 이상적 가치가 정치구호의 차원을 넘어 어떻게 현실에 정착될 수 있는가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위정자들이 평등한 조건과 공정한 선발경쟁을 모범적으로 준수하고 국민이 이에 동참할 때 실현된다. 따라서 정치 지도층은 법적 기회평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국민 다수가 경제·사회·문화적 위계와 차이에 의해 조건적 불평등에 처할 수 있음을 공감하고 염려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념적 주장 이전에 실천행위에 필요한 자기 비판적 공감·실천능력을 갖춰야 한다. 또 재력, 정보, 사회적 자본의 이기적 활용을 통해 공정성을 기만하는 파렴치 행위가 정치의 진영논리를 넘어 상식적 기준과 판단에서 배척될 수 있어야 한다. 공공적 신뢰에 민감해야 할 정치인과 사회 엘리트층이 당파 논리적 독선으로 평등과 공정성의 기본정신을 훼손한다면 정의사회는 그저 선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민생의 안정과 사회정의 회복을 내세우며 정권이 몇 차례 바뀌었음에도 입법 권력은 여전히 정치적 다툼질에 그리고 사법 권력은 국민적 불신에 빠져있다. 국민의 행복과 정의사회를 표방하는 정치행위와 법치행정이 진영논리나 집단적 이해관심에 터한 정치 공학적 활동으로 축소되는 양상은 매우 걱정스럽다. 평등이나 공정성의 본질은 물론 실천과정의 도덕성 문제마저 외면한 채 사회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지향한다면 위정자들 스스로 기회평등과 공정한 선발에 대한 약속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내야 한다. 양심에 근거해 행위하고 민초의 처지와 희망을 공감하는 정치인과 사법·행정 관료가 주류일 때 정의사회는 물론 국민의 정치의식도 성장할 수 있다.
제 679 호 [상명만평] 검찰개혁, 불을 붙이다
황인선 (만화학과, 3)
제 678 호 [책으로 세상 읽기] 우리의 세상 (구로야나기 테츠코 - 창가의 토토)
누군가 내게 초등학교 1학년 때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을 망설일 것 같다. 그 기억이 너무나 어렴풋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창가의 토토』를 읽으며 새로운 것을 만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떠올려보게 되었다. 독특하게만 보이는 토토의 행동이 어른의 시선으로 보았기에 그런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 동심을 떠올려보니 토토의 행동이 그저 이상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토토는 유독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이다. 수업 중에도 궁금한 것이 생기면 당장 해결해야 직성이 풀려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일상이다. 처음엔 나도 토토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았다. 어른들의 입장에서 수업시간에 대뜸 책상 서랍을 드르륵 열었다 닫으며 시끄럽게 구는 토토는 굉장히 무례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토토가 8살 꼬마 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토토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책상의 서랍이 신기했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아이는 호기심을 스스로 해결하는 중에 대뜸 혼이 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창의력을 해치지 않으며 교육할 수 있을까? 소설은 그 답이 될 지도 모르는 길을 함께 제시한다. 토토의 어머니는 선생님께 정중히 사과하지만, 절대 토토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다만 토토를 이해해주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학교를 찾는다. 새로운 학교는 조금 독특한 곳으로,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 시간에 맞춰 등교한 아이들은 저마다 시작하고 싶은 과목부터 공부하고, 모르는 것이 생기면 자유롭게 질문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나 학생의 특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선생님이 학생 개개인을 파악하기에 더 없이 좋은 방법이다. 야외 수업도 빼놓지 않는 이 학교의 수업은 호기심 많은 토토가 제 궁금증을 모두 실험해보고, 질리도록 같은 행동을 반복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다만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토토는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만약 토토의 어머니가 아이를 무작정 혼내기만 했다면, 새로운 학교에서 토토의 행동을 억지로 규정했다면 토토가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아이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 당장 한국 사회에 이런 교육 방식을 도입하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과 문제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수업의 주인이 되는 교실은 우리 사회가 배울 점이다. 일방적인 지식 전달식의 수업과 수치화된 성적으로 평가되는 모든 활동. 아이들은 ‘혹시라도 틀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발표를 주저한다. 이런 교육이 계속된다면 똑똑한 사람들은 넘쳐날지 몰라도 스스로 사고하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지나친 입시 경쟁에서 벗어나, 우리 아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지지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제 678 호 [영화로 세상 읽기] 우리 지금 상황이 재난 그 자체라도
엑시트 감독: 이상근 우리 지금 상황이 재난 그 자체라도 우리 사회에는 언젠가부터 ‘웃프다’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떤 특정한 상황이 웃기고도 슬프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 신조어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감정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감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입시가 하늘의 별 따기라더라, 그러고 나서도 취업이 그렇게 또 어렵다더라, 그 와중에 경기도 좋지 않아서 다들 힘들다더라, 하는 사회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격렬하게 화를 내기보다는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편을 택하며 버틴다. 대부분의 우리는 말 그대로 웃기고도 슬픈 인생을 살고 있다. 영화 <엑시트>는 이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웃기고도 슬픈 인생들을 아예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던져버린다. 집안의 골칫거리이자 고민거리인 취업준비생 ‘용남’과 아르바이트생과 비슷한 처지의 연회장 직원이 된 용남의 동아리 후배 ‘의주’를 비롯한 사람들은 정말 갑자기, 의문의 가스폭발 사고로 인한 재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 헬기의 구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가스는 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하면 고통스럽게 죽는다. 살아남고 싶다면 가스가 차오르는 속도보다 빠르게 뛰어야한다. 영화 속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인공적으로 설계한 구조일 뿐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절묘한 상황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설정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웃픈’ 한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를 담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무한경쟁사회에서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마치 ‘용남’과 ‘의주’처럼 말이다. 목숨을 걸고 건물 벽을 오르는 이질적인 모습에 어쩐지 몰입을 하고 공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의미로든 달리는 행위는 스스로의 힘 말고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지켜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응원뿐이라는 것마저도 현실과 닮아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는 언제나 달려가지만, 우리가 다가가고자 하는 목표가 항상 우리의 출구가 되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상황의출구라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와 은유가 가득한 이 영화의 제목이 ‘엑시트’라는 것은 제일 먼저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아이러니인 셈이다. 결국 영화는 우리에게 ‘불안하더라도 계속 달리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메시지가 주변 어른들의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야.’라는 덕담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이마저도 웃픈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게 정말로 ‘좋은’ 날이 오는지는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막막한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보내는 격려는 웃프면서도 힘이 된다. 어쨌든, 다 같이 좀 더 달려보자. 어느 건물의 옥상까지든, 도시 한 가운데에 우뚝 선 타워크레인까지든. 달리다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테니까. 전혜연 (한국언어문화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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